어제 소개한 책을 읽다가 감동 받은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연락주세요. 절판된 책이라서 도서관이 아니면 볼 수 없네요)
혹시 이북리더 스토리를 가지고 계시다면
이곳에서 다운 받아서 저장해서 봐도 좋을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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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넬이 남긴 선물
어느 날 아침 레이넬이라는 38세의 여자 환자가 병원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은행원과 결혼해 일곱 살 난 아들을 둔 주부인데 말기 유방암을 앓고 있다고 했다. <행복으로 가는 길> 프로그램에 대해 들었다면서,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치료하는 나의 방식에 관심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는 부탁을 해왔다. 남편과 아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 선물이란 바로 자신의 집에서 품위를 지키며 아름답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레이넬과 통화를 하면서 나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그녀를 일단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레이넬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시였다.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우아한 저택으로 들어서며서 나는 레이넬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관에서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레이넬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레이넬은 “선생님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레이넬은 초록색 눈동자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었다. 하지만 헐렁한 가운이 병마에 쇠약해진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레이넬과 나는 주방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방이 환하고 통풍이 잘 되는 주방은 안주인의 취향을 그래도 보여주는 듯했다. 창턱에는 작은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에는 그녀가 직접 그린 풍경화들이 빈틈없이 걸려 있었다. 주방의 식탁이며 의자들도 그녀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남편과 아들이 되도록 빨리 슬픔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레이넬에게서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날들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난 우리 집이 정말 좋거든요.” 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레이넬에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레이넬에게 필요한 의학적 조치들에 대해 함께 상의했다. 그녀는 화학치료는 더 이상 받고 싶지 않고,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을 잃지 않도록 진통제는 충분히 달라고 했다. 나는 필요한 약의 종류와 분량을 정해줄 통증 전문의를 추천해 주었다.
레이넬의 두번째 부탁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집을 방문해 이야기를 들어달아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심정과 공포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시 자신의 이야기를 ‘귀 귀울여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분석도 덧붙이지 말고 그저 들어주는 것 말이다.
남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나는 오랫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의사로서의 태도를 접어두고 오직 그녀의 옆에 함께 있어주기 위해 애썼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차 그 역할에 익숙해졌다. 레이넬은 훌륭한 교사였다. 그녀는 내게 우리의 약속을 끊임없이 상시기켜 줌으로써 내가 의사로서의 고정 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소에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새로운 역할이 만족스러웠다. 단지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의학적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내가 레이넬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병세가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정해진 시간에 그녀의 집을 방문해 보니 남편, 아들 그리고 기타와 플롯을 연주하는 두 친구가 있었다. 레이넬은 자신이 죽을 때 연주할 곡을 연습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던 것이다. 레이넬은 포함해 모두는 30분 동안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곡을 연습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노래 연습이 끝난 후 우리는 이야기 들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가 끝나고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는 내게 레이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말 큰 도움이 돼어주셨어요.” 라고 말했다. 사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과대학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의사가 환자를 도와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치료 행위를 하는 것이지 단지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레이넬의 남편으로부터 아내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어서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네이넬의 집으로 달려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레이넬의 모습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하얀 꽃을 두 송이 꽂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가쁜 호흡만 아니라면 그녀가 환자라는 표시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넬은 비록 육체는 죽어가고 있지만 마음은 너무나 평화롭고 의식도 또렷하다며 희미하게 미소를지어 보였다.
남편과 아들 그리고 연주를 하는 친구들이 침대 곁으로 다가갔고, 그녀는 한 사람씩 손을 잡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남편과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방 안에 노랫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간혹 흐느낌이 섞여 나오긴 했지만 노래는 끝까지 계속되었다.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레이넬은 눈을 감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침대 곁에 서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불과 몇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았다. 잠시 후 나는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망 사실을 확인하는 몇가지 절차를 밟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3,0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의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정작 ‘치료 행위’ 라고는 거의 한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의사라는 점이 그토록 선명하게 가슴에 와닿은 적이 없었다.
레이넬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나는 가끔 그녀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들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레이넬을 기억하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용기가 남은 가족들에게 슬픔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네이넬의 아들은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가 되었고, 얼마 전에 결혼도 했다. 레이넬의 남편도 몇 년 후에는 재혼을 했다.
레이넬은 내게 너무나 크고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녀는 말을 하는 것 못지 않게 들어주는 것이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 의사가 해야할 일로서 의학적 치료만큼이나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어렸을 때 우리 집 주치의였던 잭슨 라이스 박사에게 배웠는데, 레이넬이 다시금 상기시켜 주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넬은 리처드 라자루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학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기분과 감정이 결정된다는 주장 말이다. 레이넬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분노와 정망 속에서 헤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넬은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오히려 가족들에게 삶의 용기와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레이넬은 분노와 절망 대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남은 인생의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녀의 품위 있고 아름다운 죽음은 남은 가족들이 슬품에서 회복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레이넬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기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실질적인 의학적 치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더 나아가 레이넬의 경우에 감정 치료가 효과를 본 것처럼 기분과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신체적 질병의 치료가 가능할지의 여부도 궁금했다. 나는 의학 서적과 보고서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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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제5장 나의 몸은 기분의 포로가 되어 있다
레이넬이 남긴 선물
309~314
매튜 버드, 래리 로드스타인 지음 | 이상원 옮김
청림출판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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